돌아오고 싶은 곳
저는 군대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전역한 직후에는 주위에 그 경험을 공유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하지 않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 자랑스럽게 떠들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기억도 별로 남은 게 없고, 남아 있는 기억은 현재의 군대와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의 경험이라 누구에게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을 테니 입을 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나쁜 경험은 아니었고,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배우게 된 것도, 얻게 된 것도 분명 있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삶 속에서 다시 한 번 겪어보고 싶은 경험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전역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그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는다”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의 중고등학교 시절이 군대와 비슷했습니다. 일방적인 통제와 강요된 학습, 야만적인 취급, 의견이 존중받지 못하는 생활이 군대보다 더 길게, 그것도 더 어린 시절에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제가 나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교실에서 박장대소하던 순간들이 가끔 떠올라도, 드물지만 마음을 움직였던 몇몇 선생님들의 말씀들이 여전히 나의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도 굳이 찾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반면에 바로 그 시절, 그러니까 청소년기에 저를 키웠던 동네의 풍경은 여전히 그립습니다. 성인이 되어 그 동네를 떠난 뒤에 재개발이 이루어져 이제 그곳에는 제가 기억하던 풍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사라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리워지곤 합니다. 그럴 때면 가끔 디지털 지도를 열어봅니다. 거리뷰라는 이름으로 도로를 따라 동네 풍경을 골목골목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직접 찾아가는 대신 그렇게 어린 시절 오가던 길을 마우스로 탐색합니다. 뜻밖에 남아 있는 길과 풍경이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싶을 만큼 변해 버린 풍경을 보며 먹먹한 마음을 달래기도 합니다.
그렇게 옛 동네를 온라인으로라도 찾아가는 이유는 좋은 기억 때문입니다.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같이 연습장에 만화를 그리던 거의 유일한 친구의 집, 어린이들이 별로 찾지 않아 자주 비어 있던 그네를 타던 도서실 옆 놀이터, 지친 마음이면 들러 기도를 하거나 기타를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던 교회 등 칙칙한 삶에 위로였고 온기였던 공간들은 지금도 늘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다시 가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거기 남아 있기를 바라게 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온기가 되었으면 바라는 곳입니다.
오늘 명왕성에 모자를 눌러 쓴 젊은이가 불쑥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저 S에요.” 하면서 모자를 벗습니다. 그랬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한 형 따라서 운영진을 하겠다고 와서는 까불대던 그 얼굴입니다. 대학을 다니던 중 다음 주에 군대 가게 돼서 내려왔는데 지나가다가 제가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 들어왔다고 합니다. 반갑기도 하고 군대 간다고 바짝 깎은 머리가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번 달에는 명왕성의 옛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네요. 설립할 때부터 누구보다 당차게 명왕성을 이끌었던 O가 얼굴도 모르는 후배 운영진들 준다고 두바이 쫀득 쿠키 재료를 싸들고 온 게 시작이었습니다. 운영진을 하지는 않았지만 명왕성에서 늘 기타를 치고, 그래서 공연도 했던 C도 군대 갔다가 첫 휴가를 나왔다고, 집에 가기 전에 먼저 들렀다고 군복을 입은 채로 방문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역시 명왕성을 함께 만들었던 Y도 불쑥 들렀습니다. 외조부님 상을 치르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잠시 짬을 내서 들렀다고 하며 그간 나쁜 어른들에게 사기도 당하는 등 마음고생을 했다고 담담히 이야기했죠. 추억에 잠겨 둘러보다가 냉동실의 음식물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서울 올라가면 지금 안 쓰는 음식물 처리기를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버스 시간 맞추느라 서둘러 나갔습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 제가 좋아했던 동네의 그 풍경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에게 여기 명왕성은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 되었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명왕성은 세상을 바꾸려고 만든 곳이 아닙니다. 그냥 좀 졸리니까 들러 누워있다가 가고, 친구들이랑 정말 별 거 아닌 이야기로 깔깔대다가 가고, 급할 때 숙제를 하다가 가고, 출출할 때 라면 하나 끓여 먹다 가고,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을 때 멍하니 있다가 갈 수 있는 곳이 된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좋습니다. 당장은 내 주변에 나무나 풀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거기 있으니까 이용하다가 가더라도 나이가 들어 치열하게 살다가 문득 외로운 날에 떠오르는 곳이 된다면, 그래서 다시 가 보고 싶은 장소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소박한 위로가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만드는 것이 명왕성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