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성 칼럼

제목조바심2026-04-24 20:04
카테고리코디칼럼
작성자

조바심

 

명왕성 운영진 회의 시간을 어렵게 잡았습니다. 저도 나름 잡다한 일정들이 많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청소년들에게 비할 바가 아닙니다. 청소년들의 삶은 두어 시간의 공백을 내기 어려울 만큼 빠듯합니다. 스스로 채워 넣지 않은, 선택할 수 없었던 빼곡한 일상이기에 조정도 쉽지 않죠. 몇 번의 노력 끝에 모두가 참석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할 수 있는 시간에 회의를 열게 되었습니다.

 

다음 달에 해 보자고 했던 행사 계획을 세웁니다. 시험 직후에 해 볼까 했지만 준비하는 사람들도 시험을 치는 입장이라 부담스러웠는지 시험 마치고 한 주 후에 행사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홍보는 누가 어떻게 할지, 당일 준비할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두루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니다. 행사 준비가 주된 회의 목적이었으니 기타 토의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제가 들고 온 이야기는 요즘 청소년들이 명왕성에 잘 안 오는 것이 걱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주중에 이용률이 많이 떨어져서 한 명도 오지 않는 날도 종종 있기에 운영진들에게 원인도 묻고, 해결방안도 묻고 싶었습니다.

 

방과후가 시작됐는데 방과후 마치면 저녁 여덟 시에요. 명왕성 올 시간이 없을 거예요.”

시험 기간 다가와서 학원에서도 공부 시간이 길어졌어요.”

중간에 시간이 잠깐 난다고 학교에서 여기까지 오긴 어려울 걸요.”

 

그렇군요. 그럴 만한 사유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모두가 방과후 수업을 들어야 하는 건지, 방과후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지 말이죠.

 

방과후 안 하는 애들 많죠.”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명왕성 이용이 저조한 이유로 방과후 수업을 꼽았지만 정작 방과후 수업을 듣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니 앞에서 했던 대답을 스스로 한 방에 부정하는 꼴입니다. 잠시 웃다가 어쨌든 방과후 수업도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정리를 했습니다. 방과후 수업은 어쩔 수 없다지만 시험 마친 이후로 청소년들이 명왕성을 더 활발하게 이용하게 할 방법들은 없을까요? 질문을 했는데 어째 반응이 미지근합니다. 질문을 잘못했나 봅니다. 더 앞 단계로 가서 질문을 다시 합니다.

 

애초에 명왕성에 사람이 많이 오는 게 필요한 일일까요?”

 

눈치를 보다가 한 명이 사실...”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가끔 명왕성에 사람이 많이 오면 운영진 입장에서 관리가 쉽지 않다, 노래를 크게 부르거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면 들어오려다가 나가는 사람도 있더라, 조용한 분위기에서 친구랑 마음 편히 있다가 가고 싶은 경우도 있다 등등 명왕성에 사람이 덜 오는 게 오히려 좋다는 이야기를 돌려돌려 말합니다. 급히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죠.

 

행사를 하거나 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하고, 홍보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평소에는 사람 많이 오지 않아도 크게 나쁠 게 없다는 얘기가 흐려진 말꼬리에 숨어 있을 겁니다. 다른 운영진들의 얼굴을 둘러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말에 다들 비슷한 속내를 드러냅니다. 그렇군요. 올해 운영진들은 시끌벅적하게 모여 노는 분위기보다 조용히 차분차분 각자 할 일들을 하는 분위기를 선호하는 청소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올해는 그런 명왕성이 되어야죠. 명왕성의 운영방향은 청소년 운영진이 결정하는 거니까요.

 

회의를 마치고 모두 돌아간 뒤에 뒷정리를 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청소년 자치공간이 잘 운영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처음 명왕성을 열었을 때는 매일 많은 청소년들이 찾아와 활기차게 이용하곤 했습니다. 그 때도 물론 너무 사람이 많아서, 조용히 있을 수 없어서 발걸음을 돌린 청소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왕성 방명록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 그 숫자를 헤아리며 명왕성이 잘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했죠. 행사를 치를 때 참여 인원이 적으면 망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텅 빈 명왕성을 지키고 있을 때면 뭔가 잘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과 조바심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회의를 복기하다 보니 관점을 바꿔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때는 많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놀기 좋아하는 청소년들의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차분하고 조용히 지내고 싶은 청소년들에게 기회가 온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와글와글 복작복작한 명왕성이라면 조용히 머물고 싶은 청소년들은 어디에서 마음 편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현재 운영진이 생각하기에 지금 분위기가 좋다고 한다면 그것을 내 의지로 꺾고 많은 사람들이 오도록 홍보하라고 종용하는 게 청소년 자치공간이 지향할 방향일까?

 

명왕성이 지속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마음을 내어 주시는 만큼 책임감도 무겁게 느낍니다. 그런 책임감이 불안과 초조함, 조바심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오늘 마음을 이렇게 정리했지만 명왕성에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이면 저는 또 마음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을 겁니다. 그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불편함이 있을 때면 언제나 되물어야 합니다. 청소년 자치공간이 잘 운영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지, 명왕성에 대한 후원은 어떤 방향성에 대한 지지인지, 처음 명왕성을 시작할 때처럼 물어야 합니다. 일본의 가미시라타키역이 여고생 한 명을 위해 폐쇄하지 않고 운영했다는 이야기처럼, 한 명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죠. 그런 세상을 느끼며 성장한 청소년의 삶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명왕성은 운영됩니다. 오늘도 혼자 잠시 들렀다가 가는 한 명의 청소년을 보며 조바심 나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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